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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준 목사 간증] 꼴통목사의 전도행전(10)
생선 장사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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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디엔 기자 작성일23-05-31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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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초가을이었습니다. 낮에는 30도에 웃도는 더위지만 새벽녘과 아침은 제법 쌀쌀한 날씨였습니다. “따르릉~” 매우 급한 목소리였습니다. “사모님 빨리 서울역에 가서 목포행 마지막열차가 몇 시에 있는지 표 2장을 끊고 서울역 대합실에서 만납시다.”

다음날 오전 10시에 고 목사님은 목포교도소 집회를 인도하실 예정이었습니다. 당일 아침에 서울서 출발하게 되면 교도소 집회시간이 늦어지므로 전날 새벽기차를 타시려 했습니다. 그런데 새벽기차는 운행되지 않았고, 마지막기차는 밤 10시 5분에 있었습니다.  목포에 도착하면 새벽 3시이기에 어중간한 시간이었지만 목사님과 저는 이 기차를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짐을 챙겨 서울역에서 목사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밤 10시 5분에 출발하는 기차이기에 늦어도 10시전까지는 기차에 몸을 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10시가 다되어가는데도 목사님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안절부절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목사님은 사모님과 생선 장사를 하시고 사모님을 집에 모셔다 드려야했기에 늦으셨던 것입니다.

10시 3분정도 됐을까. “사모님 빨리 출구로 뛰어요!” 목사님이었습니다. 대합실로 오시는 목사님의 발은 계단을 2, 3개씩 뛰어 오르고 있었습니다. 전 뒤도 안돌아보고 출구 쪽으로 달렸고, 기차는 출발신호를 울리고 있었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 목사님과 저는 간신히 기차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저희는 입석을 끊은지라 후덥지근한 기차 안에 끈적거리는 사람들 틈에 끼어 서 있어야했습니다. 전 그제야 목사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인사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새까맣게 탔고,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나를 더 놀라게 했던 것은 꼬질꼬질한 옷에서 나는 생선 비린내였습니다. 난 그때부터 목사님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찰해 내려갔습니다. 머리에는 모자를 쓰셨는지 이리저리 뻗쳐있었고, 짜면 한 바가지 정도 물이 나올 것 같이 땀으로 젖어있는 티셔츠, 무릎이 나오고 엉덩이가 늘어져 헐렁한 바지 등등. 저는 순간 너무나 창피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씻을 시간 여유가 없어 장사하던 모습 그대로 오신 줄을 잘 알면서도 그런 목사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부끄러워했습니다.

기차의 많은 사람들이 모두 목사님과 저를 보는 것만 같았고, 옆에 있던 사람이 자리를 조금만 움직여도 그것이 코를 찌르는 고약한 생선 냄새 때문인 것 같아서 저는 되도록 목사님과 좀 모르는 사람처럼 하고 싶었습니다. 제 마음을 조금도 모르는 목사님께서는 눈치도 없이 어쩌다 빈자리가 생기자 “사모님”하고는 저를 자리에 앉게 해 주셨습니다.

목포에 도착 될 무렵, 많은 사람들이 기차에서 내렸고, 여기저기 빈자리가 많았습니다. 저도 자리에 앉았고, 내 옆자리도 비어있었습니다. 당연히 목사님이 저의 옆자리에 앉으실 줄 알았습니다. 근데 목사님은 저와는 아주 멀리 있는 자리에 앉아 준비하신 원고를 보셨습니다.

나는 목사님을 창피해하고 모르는 사람처럼 계셨으면 했었는데 피곤한 몸을 재촉하며 글을 읽고 계시는 목사님을 뵈니 맘이 울컥하며 목사님이 측은해보였습니다. 나보다도 내 맘을 더 먼저 아시고 같은 장소를 가는 일행임에도 멀찍이 자리를 잡으신 목사님 정말 죄송했습니다.

기차가 거의 도착할 무렵, 기차선반에서 묵직하고 두툼한 가방을 꺼내신 목사님은 기차 안 세면실에서 머리를 감고, 세수도 하고 또 흰 셔츠에 넥타이, 양복까지 갈아입으시고 자리에 앉아 또 준비해 오신 원고를 읽으셨습니다. 드디어 역에 도착해 거리로 나오니 새벽공기는 쌀쌀했고, 거리는 캄캄했습니다. 어디로 갈 데가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리시더니 저를 데리고 빨간 십자가 탑이 보이는 일로 장로교회로 가셨습니다. 교회 안도 새벽예배 전이라 캄캄했습니다. 강단 앞 희미한 십자가를 비추는 불빛 외에는 아주 적막했습니다. 몸을 웅크리고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 후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 먼 곳까지 달려왔지만 마중 나오는 사람도 없고, 오갈 데가 없어 새벽 찬바람을 맞으며 기다리는 것에 지쳐 한숨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잠시잠깐 마음을 잃은 나를 깨운 건 목사님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뜨거운 햇볕에 이리 저리 쫓겨 가며 사모님과 하루 종일 생선장사로 고생하여 버신 목숨 같은 돈으로 떡이며, 과일이며, 때론 영치금에 필요한 물품까지 기쁨으로 나누고 베푸셨습니다.

새벽예배를 마치고 새벽 5시30분경 밖으로 나왔습니다. 식당이 문을 안 열어서 빵과 우유로 허기를 채웠고, 목포교도소 쪽으로 걸어 올라가는데 한 방울 두 방울 빗줄기가 그어지더니, 급기야는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습니다. 목사님과 저는 목포교도소 입구에 면회자 대기실에서 아침 7시에서 10시까지 시간을 보내야했습니다. 비가 내려 추운 대기실에는 딱딱한 나무의자가 있었습니다. 교도소 정문이 보였고 가끔은 사람의 모습도 보였지만 어느 누구도 반가이 맞아주는 사람도,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얼마나 피곤하셨는지 목사님은 딱딱한 나무의자에 추운 것도 잊은 채 코를 골며 주무셨습니다.

그런 목사님을 보니 예전 일이 생각났습니다. 한번은 목사님이 저희 집 앞에 차를 세워놓고 저를 데리러 오셨습니다. 영등포교도소로 사역을 떠나는 날이었습니다. 전 짐을 챙겨 저의 집 앞에서 목사님 차를 두리번거리며 찾았습니다. 아무리 봐도 차는 안보였습니다. 잠시 후 “사모님 여기요.”하고 부르는 목사님을 발견했습니다. 순간 여기저기 녹슬고 벗겨지고 찌그러진 1톤 포터차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덜덜덜 떨리는 엔진소리와 함께 나타난 목사님의 트럭. 더 재미있는 것은 짐칸에 실린 빨강색 대형고무함지박 4~5개, 물통 여러 개 올갱이, 생선 등등. 그리고 한쪽에는 교도소에 가져갈 정성이 담긴 떡 담은 박스와 사과 상자들이 보였습니다. 그래도 목사님이신데 번쩍거리는 까만 세단을 생각했던 전 거의 쓰러질 뻔 했습니다. 

목사님 차는 금방이라도 멈춰 버릴 것 같았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운전석과 조수석 뒤로 작은 공간에 사모님이 타고 계셨다는 겁니다. 다리도 펴지 못하고 쪼그리고 앉아계시는 사모님을 뵈니 많은 고생이 묻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하게 웃으시며 오류동 거리로 장사를 가시는 중이라고 하셨습니다. 조그마한 몸에 자신이 들어가 목욕을 해도 될 만한 크기의 고무함지박 3~4개를 목사님이 내려주자 사모님은 손수레에 그걸 밀고 다니며 장사를 했습니다. 

영등포교도소의 교도관들도 목사님 차를 이상한 눈초리로 보았지만 목사님은 “기독교 집회 왔습니다.”라며 당당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내가 본 목사님의 똥차는 지금 와서 생가해보면 보물을 나르는 가장 귀하고 값지고 멋진 차였습니다. 내가 보았던 똥차의 짐칸에는 갇혀있고, 소외되고, 외로운 저들에게 나누어주고, 베풀어주는 보물을 실은 짐칸 이였습니다. 

목사님은 이날 영등포교도소 집회를 끝낸 후 그길로 바로 사모님이 계신 곳으로 가셔서 생선 장사를 하셨습니다. 빨간 함지박을 엎어놓으시고 쪼그리고 앉으셔서 생선을 파시는 목사님과 사모님. 그러다 단속반이 나오면 무거운 고무 함지박을 이리저리 끌고 숨겨가며 때로는 욕도 먹어가며 하시는 길거리 생선장사 목사님이십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생선 장사하는 목사님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에 예수님의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시는 목사님의 사역을 자랑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너무나도 가까이에서 많은 시간 동안 목사님을 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목사님의 사역에 가식이 있었다면 전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겁니다.

제 글에 두서는 없지만 전 본 대로 느낀 대로 아는 대로 진실을 썼습니다. 남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이 사람의 힘으로만 할 수 있습니까? 생선을 팔아서 재소자들을 위해 아낌없이 나누고 베풀고 있는 고봉준 목사님을 도와 하나님의 일에 사용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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