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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탄함의 신앙, 흔들림의 시대를 건너온 유영준 장로
교회 분쟁·IMF·코로나를 지나 ‘순종’으로 남은 사람

유현우 기자
작성일 2026-02-04 11:24

본문

<대한민국 기독교 인물 열전 16>

유영준 장로는 자신의 신앙을 이야기해 달라는 말 앞에서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든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한다큰 사건이 없어서,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 말은 겸손의 수사가 아니다.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삶을 돌아보아도 극적인 사건이 없고, 신앙의 여정에도 사람들 앞에서 꺼내 놓을 만한 장면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큰 실패도, 극적인 회심도 없었다. 다만 평탄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는 그 사실 하나를 인정하게 되었다. 평탄하게 살아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감사의 이유였다는 사실을.

그의 신앙은 처음부터 조용했다. 집안은 사대째 기독교 가정이었다. 북한 운산 지역에서 시작된 신앙의 뿌리는 해방과 전쟁을 거쳐 남쪽으로 이어졌다. 일가친척들은 흩어졌지만, 신앙은 흩어지지 않았다. 집안에 모임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예배로 시작했고, 기도는 특별한 결단이 아니라 생활의 일부였다. 누군가 신앙을 가르치거나 강조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 안에서 자랐다. 신앙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공기처럼 존재했다.

·고등학교 시절을 미션스쿨에서 보낸 그는 예배와 찬송, 말씀에 익숙했다. 그러나 그 익숙함이 곧 열심은 아니었다. 대학에 들어가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는 교회에서 멀어졌다. 술과 담배를 배웠고, 교회는 생활의 중심에서 자연스럽게 비켜섰다. 그 시간은 십여 년 넘게 이어졌다. 그러나 그는 그 시기를 완전히 떠난 시간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마음 한편에는 늘 돌아갈 자리 하나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를 돌아올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돌아왔다.

결혼 이후 맞닥뜨린 오랜 기다림의 시간은 그의 신앙을 다시 현실로 끌어당겼다. 아이가 생기지 않던 시절, 아내가 먼저 교회를 찾았다. 그는 그 뒤를 따랐다. 다시 예배 자리에 앉았을 때, 이전과는 다른 감각이 찾아왔다. 그는 그때 처음으로 신앙을 인격적으로받아들였다고 말한다. 기도는 간절했지만, 그는 그 시간을 극적인 응답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고 아이가 태어났을 때, 기쁨보다 먼저 찾아온 것은 책임감이었다. 잘 키워야 한다는 마음, 그 무게가 그의 신앙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직장에서는 은행원으로 평생을 보냈다. 안정적이었지만, 시대는 늘 안정적이지 않았다. IMF 외환위기는 조직 전체를 흔들었고, 합병과 구조조정의 파도는 많은 사람들을 떠나게 했다. 그는 그 한가운데서 신우회 활동을 이어갔다. 점심시간에 모여 드리는 짧은 예배, 엘리베이터 안에 붙여 둔 말씀 한 구절, 조용히 나누는 기도 제목들. 누군가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누군가는 불편해하지 않았다. 그는 신앙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고, 숨기지도 않았다. 다만 그 자리에 두었다. 신앙은 직장 안에서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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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유영준 장로 가족 사진> 

상계감리교회(현 빛가온교회) 옮겨 온 이후 큰 흔들림이 있었다. 1990년대 중반, 교회는 분쟁으로 갈라졌다. 예배가 끝난 뒤 고성이 오갔고,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그는 그 시간을 힘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마음이 복잡했다고 표현한다. 떠날 수 있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떠났다. 그러나 그는 남았다. 특별한 결심이나 선언은 없었다. 다만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 무렵에도 그는 찬양대 자리를 지켰다. 앞에 나서 말을 보태기보다, 찬양으로 예배를 붙드는 쪽을 택했다. 상계감리교회 시절부터 이어진 그의 찬양은 오래된 자리였지만, 그 자신은 그것을 사역이라 부르지 않았다.

빠지지 않고 섰다는 사실만이 남았다. 말이 많아질수록 교회는 더 흔들렸고, 그는 노래로 그 시간을 건너고 있었다.

이후 교회는 긴 침체의 시간을 지나 다시 변화를 맞았다. 교회는 서길원 담임목사의 부임과 함께 전도의 방향을 선택했다. 갈등을 붙잡고 설명하기보다, 바깥을 향해 문을 여는 선택이었다. 유영준 장로는 앞에 서기보다 곁에 서는 방식으로 그 흐름에 함께했다.

장로로 세움을 받은 그는 성전 건축의 전 과정을 감독했다. 그는 거의 매일 현장을 오갔다. 땅의 조건은 쉽지 않았고, 행정 절차와 재정 문제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 시간을 자신의 신앙 여정에서 가장 보람 있는 시기로 기억한다그는 이 일로 교회에서 어떤 사례도 받지 않았다. 맡겨진 일이었고, 그래서 조건을 말하지 않았다.

코로나 팬데믹은 다시 공동체를 멈춰 세웠다. 예배당 문이 닫혔고, 명단 제출과 검사, 오해와 불신이 이어졌다. 온라인 예배와 영상 사역으로 버텼지만, 교회를 떠나는 이들도 있었다. 자녀 세대 역시 그 시기를 지나며 교회에서 더 멀어졌다. 그는 이 사실을 담담하게 말한다. 더 이상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말 대신 태도를 남기기로, 그리고 기도하기로 선택했다. 그의 신앙 전수는 설명이 아니라 지속이다.

그는 교회 안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감리교 서울연회 남선교회를 비롯한 연합 활동에도 참여하며, 교회와 교회, 교회와 사회를 잇는 자리에 섰다. 어디서든 그는 같은 방식으로 머물렀다.

그는 평소 책을 가까이 두는 사람이었다.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한국사와 초기 한국 교회사, 선교사들의 삶을 읽었다. 양화진 선교사 이야기를 교회 안에서 나누었고, 국내 성지순례와 역사 현장에서 해설을 맡기도 했다. 설명은 길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귀를 기울였다.

그의 신앙을 한 단어로 묻는다면 그는 순종이라고 답한다. 잘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과거 목사가 되라는 권유를 받았던 순간에도 그는 마음으로는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길은 열리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실패로 여기지 않는다. 마음의 순종으로 충분했다고 말한다. 결과는 자신이 감당할 몫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영준 장로의 신앙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사라지지도 않는다. 떠날 수 있었던 순간마다 그는 남았고, 말할 수 있었던 자리에서는 침묵을 택했다. 그의 삶에 남은 것은 성취의 목록이 아니라 기준의 흔적이다. 평탄했기에 지켜낼 수 있었고, 흔들렸기에 더욱 또렷해진 신앙. 그는 오늘도 그 자리에 있다. 말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그것이 그의 인물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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