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미당 시의 8할이 바람이었다면”
본문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 외할아버지의 숯 많은 머리털과 /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 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도 /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 빛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 병든 수캐 마냥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미당 서정주, 자화상)
저는 집회를 가는 곳마다 항상 그 주변에 있는 문학관을 방문합니다. 그중에 하나가 서정주 문학관이었습니다. 문학평론가인 김종회 교수님에 의하면 현대 시인이라면 서정주의 벽을 넘어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물론 서정주 시인이 친일 행적을 남겼던 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죠. 이육사와 윤동주처럼 저항 시인이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미당은 역사에 흠결을 남겼지요. 그런데 서정주문학관에 가니까 관장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서정주 시인은 자발적 친일을 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수동적 친일을 하였다”고 말입니다.
김춘수 시인은 일제 시대에 반일 운동을 하다가 여러 번 투옥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마다 한 번도 일본인이라는 말을 써본 적이 없대요. 사실 그분도 시인으로서 ‘꽃’이라는 명시를 남긴 분 아닙니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하나의 /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나의 /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런 아름다운 시를 쓰신 분이 강의 때마다 항상 “저 일본 놈의 새끼들, 저 왜놈들” 이라고 표현을 하셨대요.
제가 서정주문학관에 가서 보니까 왜 자기 시의 8할이 바람이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더라고요. 생가 뒤편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저 멀리 바다가 있어서 언제나 바람이 막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닷바람과 산바람이 서로 마주하는 게 느껴졌습니다. 그 자연 풍광과 바람 속에서 서정주 시인이 탄생한 것입니다.
저도 14권의 시집을 쓸 뿐만 아니라 ‘영혼을 담은 시쓰기’라는 책도 냈습니다. 그리고 ‘성경 인물 시집’을 냈고, 요즘은 국민일보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라고 하는 연작시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 최고의 시인이신 정호승 시인도 저의 시를 찬사했을 뿐만 아니라 이 시대 최고의 문학평론가인 김종회 교수도 저만의 독특한 시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인정해 주실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제 시의 8할은 요천수와 지리산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제가 다녔던 초등학교에서 보면 지리산 정령치가 보였고 앞에는 섬진강 상류인 요천수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지리산 정령치와 요천수를 바라보면서 저의 문학성과 시성이 발현되기 시작하여 오늘의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예정의 은혜였을 것입니다. 저를 지리산 자락에 태어나게 하시고 요천수를 바라보며 자라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