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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무 칼럼] 두려움은 사탄의 명함이다
‘귀신 참교육’을 바라보는 기독교적 시선

씨디엔 기자
작성일 2026-10-17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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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아내와 함께 TV 뉴스를 보다가 한 장면에 시선이 멈췄다. 용인 한국민속촌에서 귀신 분장을 한 배우들이 아이들을 꾸짖고 있었다. 부모가 아이의 편식이나 떼쓰기, 형제간 다툼을 이야기하면 배우는 말을 듣지 않을 경우 잡아가겠다고 위협한다. 아이들은 울면서 부모 말을 잘 듣겠다고 약속하고, 주변의 어른들은 웃으며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른바 ‘귀신 참교육’이었다.

어른에게는 분장한 배우와 벌이는 상황극일 수 있다. 그러나 어린아이에게도 같은 경험일까. 부모마저 그 존재의 위협을 인정한다면, 아이는 자신을 해칠 수 있는 무언가 앞에 실제로 서 있다고 느낄 수 있다. 그 순간의 눈물과 약속을 교육의 성과로만 평가해도 되는지 묻게 된다.

부모의 말을 듣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것과 아이에게 좋은 것을 가르쳤다는 것은 다르다. 아이는 잘못된 행동의 이유를 배우기보다, 무서운 존재의 요구에 복종해야 안전하다고 배울 수 있다. 자신을 지켜 줄 부모가 그 위협을 훈육의 도구로 사용한다는 점도 돌아볼 문제다.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는 여기에 영적 인식의 문제까지 더해진다. 아이의 마음에 어떤 존재를 두려워하고 누구의 권위를 신뢰하도록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신명기 18장은 점술과 주술, 영매를 통한 문의와 초혼을 엄격히 금한다. 그 목록에는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행위도 포함된다. 예레미야는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세워진 도벳에서 자녀들이 불살라지는 현실을 고발했다. 하나님은 그것을 두고 “내가 명령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일이니라”(렘 7:31)라고 말씀하셨다.

오늘의 귀신 분장 놀이를 고대의 자녀 희생제사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부모가 종교와 문화의 이름으로 자녀에게 무엇을 경험하게 하는지 묻는 일은 여전히 필요하다. 성경은 자녀를 맡은 어른에게 분별과 책임을 요구한다.

점술과 주술에 대한 경고의 핵심 역시 분명하다. 하나님께 구해야 할 인도와 보호를 다른 영적 통로에서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우상에게 드리는 제사를 두고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전 10:20)고 경고했다. 성경은 이러한 행위를 취향이나 오락의 문제로만 다루지 않는다.

물론 귀신 분장을 보는 것, 공포영화를 감상하는 것과 실제로 영을 부르는 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그러나 그 차이를 인정한다고 해서 문화적 경험이 사람의 영적 관심에 미치는 영향까지 가볍게 볼 수는 없다.

사람들은 강렬한 몰입을 즐기기 위해 공포물을 찾는다. 일상의 잡념이 사라질 만큼 긴장하고, 끝까지 견뎠다는 만족감을 얻기도 한다. 문제는 그 몰입 속에서 무엇이 강력하고 매력적인 것으로 마음에 남느냐는 것이다.

무속과 주술이 초자연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유능한 수단으로 묘사될 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실제로 경험하고 싶어질 수 있다. 처음에는 구경하던 것이 익숙해지고, 익숙해진 것이 신뢰와 의존의 대상이 될 가능성도 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길을 가는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인은 자신의 호기심이 어디를 향하는지 살펴야 한다.

‘두려움은 사탄의 명함이다’라는 표현은 이런 맥락에서 사용한 말이다. 모든 두려움이 사탄에게서 온다는 뜻은 아니다. 위험 앞에서 놀라거나 충격적인 경험 뒤에 공포를 느끼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상처받은 사람에게 두려워한다는 이유로 믿음이 부족하다고 책임을 돌려서는 안 된다.

다만 성경이 말하는 영적 싸움에서 두려움은 악한 자 사탄이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다. 위협을 실제보다 크게 느끼게 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위축시키며, 그 위협을 피하려고 잘못된 대상을 의지하게 할 수 있다. 해를 당할까 두려워 우상을 섬기거나 주술에 보호를 구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축사와 내적 치유 사역에서는 깊은 공포와 상처가 영적 억압의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른이 아이에게 의도적으로 강한 공포를 주고 귀신의 위협을 믿게 만드는 일을 더욱 신중하게 보아야 한다.

기독교 신앙이 사람에게 심어 주려는 것은 어둠에 대한 집착이 아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누구를 신뢰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

바울은 복음 때문에 위축될 수 있는 디모데를 이 말씀으로 격려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은 믿음으로 서게 하고, 사랑은 두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며, 절제는 감정과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분별하도록 돕는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는 말씀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악한 영의 실제를 인정하는 신앙이라면, 그보다 크신 그리스도의 권위를 더욱 분명하게 가르쳐야 한다. 귀신의 능력을 상상하는 데 마음을 쏟으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는 희미하게 남기는 방식은 성경의 강조와 어긋난다.

자녀 양육도 그 신뢰 위에 서야 한다. 잘못된 행동에는 분명한 가르침과 일관된 훈계가 필요하다. 그러나 아이의 공포를 이용해 얻어낸 순종을 ‘참교육’이라고 부르기 전에, 그 마음에 무엇을 남겼는지 살펴야 한다.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에도 돌아와 도움을 구할 수 있는 부모, 두려울 때 곁에서 지켜 주는 부모가 필요하다. 기독교 가정이라면 그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배우게 해야 한다.

우리 아이들의 마음에 오래 남아야 할 것은 자신을 잡아가겠다는 귀신의 얼굴이 아니라, 두려운 순간에도 자신을 버리지 않는 사랑이다.

손성무 목사(에하드하우스 책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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