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호 목사의 ‘논쟁으로 읽는 요한계시록④’
두 증인은 누구인가
본문
인물 해석을 넘어 증언 구조로
글 | 김진호 목사
요한계시록 11장에 등장하는 두 증인은 4대 학파가 가장 첨예하게 갈리는 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본문은 단순히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을 넘어서, 요한계시록 전체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결정짓는 중요한 기준점이 됩니다.
먼저 미래주의적 해석은 두 증인을 종말의 특정 시점에 등장할 실제 인물로 이해합니다. 이들은 초자연적 권능을 행하며, 역사 속 특정 시기에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할 특별한 존재로 설명됩니다. 이 해석은 본문의 사건성을 강조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본문을 미래의 특정 시점에 제한함으로써 현재 교회의 적용을 약화시키는 한계를 가집니다.
반면 이상주의적 해석은 두 증인을 상징적 존재로 이해합니다. 두 증인은 교회 공동체, 혹은 하나님 백성의 증언 사명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읽힙니다. 이 관점은 본문의 보편성과 적용 가능성을 넓혀 준다는 장점이 있지만, 지나치게 상징화될 경우 본문의 역사성과 긴장감이 약화될 위험도 존재합니다.
과거주의와 역사주의 역시 각각 초대교회 상황이나 교회사 흐름 속에서 두 증인을 해석하며 나름의 설명 구조를 제시해 왔습니다. 이처럼 4대 학파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본문을 해석하지만,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핵심 구조가 있습니다. 그것은 “증언 – 박해 – 죽음 – 회복”이라는 반복되는 패턴입니다.
두 증인은 능력을 행하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철저한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은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나며, 결국 하나님의 승리가 드러납니다. 이 흐름은 단순한 인물 예언이라기보다, 하나님 백성이 역사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신앙의 구조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두 증인을 특정 인물로 고정하는 해석은 본문의 일부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전체 구조를 충분히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반대로 완전히 상징으로만 환원할 경우, 본문이 가지는 긴장과 실제성 또한 약화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해석의 통일성을 모색하게 됩니다. 두 증인은 특정 인물일 수도 있고, 동시에 교회의 사명을 드러내는 구조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본문이 궁극적으로 교회를 증언의 자리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교회를 관찰자로 두지 않습니다. 항상 참여자로 부릅니다. 두 증인을 둘러싼 논쟁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됩니다.
“누가 증인인가”가 아니라 “누가 증인의 삶을 살고 있는가”입니다. 복스러운 소망은 특별한 인물의 등장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끝까지 증언의 자리를 지킬 때 드러납니다.

